<죽음의 수용소>는 저자 빅토르 프랑클(Victor Frankl)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실존적 질문들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책입니다. 저자는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환경과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태도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상황이 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태도가 상황을 바꿉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은 위대함과 관련이 없습니다. 위대함을 성취할 기회도 없고 쌓을 업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포로가 그 상황에 좌절하며 살거나 아니면 나치의 편에서 동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누군가는 그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갔습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위대하지는 않을지라도 담담하게 살아갔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라는 질문의 답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개개인이 자기 앞에 놓인 삶의 과제를 선택하는 것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 수많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창세가 4장과 5장에는 두 개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은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를 만들었는데, 그에 반해 셋의 족보는 그냥 태어나고 자녀를 낳고 죽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두 가문 가운데 어떤 가문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입니까? 당연히 가인의 가문입니다. 그들의 행적을 보면 남들에게 내세울 만하고 화려하고 자랑할 만합니다. 반면에 셋의 가문은 너무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결국에 가서는 가인이 쌓았던 화려함은 다 사라져 버렸고 셋의 자손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이 둘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에녹"입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성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었지만, 셋의 후손 에녹은 낳고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또, 가인이 자신을 위해 성을 쌓을 때 에노스는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했습니다. 이 차이가 두 집안의 결과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음을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새 역사를 만듭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인의 족보를 기록할 때는 연수가 안 나오는데, 셋의 후손은 “~세에 낳고 ~살다가 죽었다.”라고 구체적으로 연수가 표시된다는 점입니다.
인생이라는 퍼즐을 맞추다 보면 퍼즐이 잘 안 맞을 때도 있습니다. 왜! 이 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 셋의 족보를 통해 위로와 도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20년간 방주를 예비하던 노아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가인의 집안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가인의 집안은 성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하고 문화를 일으켰지만, 셋의 집안은 낳고, 살고, 죽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인이 쌓았던 화려함은 다 사라져 버렸고 셋의 자손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때로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기억하시고 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했던 일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퍼즐을 담담하게 맞추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믿음과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