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서 돌보시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론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낯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낯선 하나님과 마주한 인물이 있습니다. 욥입니다. 욥은 의롭고 순전하며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어느 날 맏아들 집에서 욥의 자녀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괴한이 침입하여 가축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습니다. 잠시 후 허리케인이 장남의 집에 몰아쳐 자녀들이 모두 몰살당하게 됩니다. 욥이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당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욥이 낯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 믿음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기 2장에서 그에게 더 큰 고난이 찾아옵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를 위로하려고 먼 곳에서 찾아왔지만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칠일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욥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욥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생각으로 말합니다. 소위 인과응보 신학으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고통이 끊임없이 찾아오면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도대체 제게 왜 이러세요?” 그런데 낯선 하나님은 우리의 편안함의 영역을 벗어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낯선 환경으로 인도하시어 훈련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욥에게 나타나셔서 입을 여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1).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풍랑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점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시나요?”라고 질문을 하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 질문들을 던지십니다. 욥기 38~41장에는 약 80개의 질문이 소개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이와 같은 질문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신비로움을 알려주시고 자신의 지혜와 권능으로 온 세상을 돌보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기독교 정통 신학에서 섭리의 하나님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보존(CONSERVATIO, 콘세르바치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섭리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가 보존되기 위해 수많은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보호하시고, 인간들을 보호하시는 사건의 사건입니다. 둘째, 협력 혹은 동행(CONCRUSUS, 콩쿠르수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뒤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고 겉으로 봐서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에도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통치(GUBERNATIO, 구베르나치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하나님의 통치는 자연과 동물, 인간의 역사와 국가들의 운명,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 주권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들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낯선 하나님을 마주할 때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내 삶의 고삐를 쥐고 계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칼빈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삶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기독교 강요 1.17.10). (2)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낯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3) 하나님은 결국에는 우리 인생의 퍼즐을 맞추어 주십니다. 그 완성된 퍼즐의 이름은 ‘축복과 위로’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퍼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들 중에 어떤 그림은 감추어져서 결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이 “때에”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낯선 고난을 당할 때 믿음의 논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눈으로 본다는 것을 영적으로 키가 자랐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키가 작아서 주변이나 환경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키가 자라고 성인이 되면 한 눈으로 보고 길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더 뜨게 해줍니다. 성도는 낯선 하나님을 경험할 때에 섭리하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